라이의 "삶의 片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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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한달은 신경숙 월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이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난 뒤 집에 '외딴방'없냐고 묻기에 외딴방을 주문해서 읽고, 이어 집에 있던 '딸기밭'을 읽고 , 친한 언니에게 빌렸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었다.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작가와 비슷한 고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남편에 대해 조금 생각을 했다. 남편과 동향인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엄연히 한 공간에 있지만 사실은 다른 배경, 다른 정서.
'외딴방'은 고등학교 때 읽었던 것 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게다가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바로 읽으니 '외딴방 20년 후'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재미없다는 주변의 평을 많이 듣고 봐서인지, 오히려 괜찮았다. 한국 회고문학 버전 '상실의 시대'랄까. 오히려 그런식으로 보니 청춘의 허무나 상처등이 다 그럴만한 의미가 있어서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청춘에는 청춘과 동의어로 사용될만한 친구들이 있지.. 그런 생각. 그러면서 내 청춘에는 누가 있었을까를 생각해봤다. 내 청춘의 풍경을 회상해 보면 CC라는 오해를 자주 받기도 했던 친한 이성친구 L이 있고, 수업시간 토론을 하며 설전을 벌이다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친해져버린 S가 있고, 남자친구였던 K가 있다. 가만히 그 시절을 생각하는 내 머리속을 들여다보면 소설 못지않게 스펙타클(?)하고 총천연색이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은 그들이 그 시절에 박제되지 않고 계속해서 내 곁에 있다는 것. L은 여전히 나와 가장 친한 이성친구이며, S는 멀리있긴 하지만(많이 멀다. -_-;;) 여전히 연락을 지속하고 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가장 생경한 표현은 바로 '태생지'라는 단어와 서울을 지칭하는 '이 도시'라는 말이다. '고향'이라는 말 대신 '태생지'라는 말을 쓴 것은 이미 작가에게 서울이 심정적으로 고향이 아닌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굳이 정읍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고 '태생지'라고 부르는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서울을 굳이 또 '이 도시'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서울이 '그냥 서울'이 아니라, 제 3의 도시를 나타내는 '그 서울'도 아닌, '이 도시'라는 것은 서울에 대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묘한 거리감을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를 예로 들어보면,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기에 서울이 그저 원래 부터 있던 그냥 서울이지 굳이 '태생지'라고 분류할 필요가 없으며, 서울 말고 다른 도시야 다 나에겐 제3의 도시인 나에겐 굳이 서울이 '이 도시'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남편에겐 서울이 '이 도시'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산 시간이 태생지에서 산 시간보다 길어져서 태생지보다 오히려 더 익숙하지만, '그냥 당연히 서울'이 아니라 어딘가는 이질적인 도시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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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7 16:34 2011/09/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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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

김인숙 - 미칠 수 있겠니
작가가 힘을 너무 많이줘서 썼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는 과감하게 쳐내고 썼으면 좋았을 걸.

최인호 -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대가의 작품이지만. 그닥 호평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악담을 하자면 짝퉁 하루끼 같은.
배경에 꾸준히 나오는 서울은 왠지 서울 같지 않고 동경 같다.

이설 - 환영
통속적이고 통속적이고 통속적이다. 근데 이것이 혹평이 아니라 호평이다.
너무 통속적인게 쉬운일이 아니다. 통속적이어서 작품성있고, 너무 통속적이어서 잔상이 길다.

넬레 노이하우스 -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재미는 있다. 하지만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다. 늘 말하듯 내가 한국식이나 영미식에 익숙한 탓인지도.
인간의 유악하고 추악한 이기심에서 사건이 비롯되었으되, 그 본성에 대한 천착은 없다.
시리즈물이라지만 곁가지인, 그래서 관찰자여야 하는 형사들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살짝 짜증이 난다.
한국 소설이었다면 무고한 청년 토비아스를 그렇게 끝까지 괴롭히지 않았을 것. 주인공에 대한 처리가 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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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11:59 2011/07/25 11:59
분류없음 2011/07/25 11:59 by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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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애정을 지속시킨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 어느 도시보다 내가 서울을 좋아한다는, 전국 어느 곳보다 서울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설명될 수가 없다. 이토록 공기가 안 좋고, 이토록 날씨가 안 좋고, 구석 구석 잘 정비되어 가는 모습은 겉만 번지르르한 유치찬란한 팬시상품처럼 보이는, 이런 얄팍한 미감을 자랑하며, 때려 부수고 지어대는, 이 사람을 쥐어 짜는 불안정한 이 도시가. 대체 왜 좋겠는가.

서울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며칠 정도 여행으로 서울을 비우는 것을 제외 하고는, 이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늘 나의 생활 근거지는 서울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한산한 강남대로를 따라 멋없는 샛자주색 시내버스를 타고 국민학교를 다녔고, 밤사이 잔뜩 뿌려진 나이트 클럽 전단지가 채 치워지지 않은 강남역길을 걸어 중학교를 다녔다. 자율학습을 빼먹고 정동길을 거닐고, 주말이면 광화문 KFC에서 치킨을 사먹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루한 대학시절의 통학길엔, 술기운을 빌어 지하철 역이름으로 당시 유행하던 허무한 이행시 짓기(예를 들어 "잠실"역이라고 하면, "잠. 잠시 쉬었다가자. 실. 실어." 이런 식의 저속하고 유치한 이행시 짓기 말이다.) 하며 자지러지게 웃기도 했다. 아무리 서울이 변하고 또 변한다지만 지저분한 강남거리와, 그래도 초여름이면 찬란한 에메랄드 빛을 안겨주었던 정동길과, 책과 예쁜 문구류를 보물창고처럼 간직하고 있던 교보문고, 저렴한 술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학교 앞 골목 등이 기억과 추억을 지배하여 서울에 대한 더 없이 큰 애정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이다.

실은 롯데월드 얘기를 하려고 이 장황한 얘기를 꺼냈다. 어제 처음으로 아이와 함께 롯데월드에 갔다. 롯데월드. 키치(Kitsche) 서울의 축소/집약판 같은 곳.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 모두가 꿈꾸는 그 곳'이라고 노래하지만, 사실은 돈벌이와 장삿속이 가득한 나라, 모두가 지갑을 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상업적인 그곳. 형형색색의 유럽흉내를 낸 가짜 건축물이 그 싸구려 색채를 자랑하며 가짜 질감과 싸구려 광택을 자랑하는 그 플라스틱 도시. 그 근처에 살 때는 그 곳이 쏟아내는 소음과 빛 공해에 눈살을 찌뿌렸던 그곳을. 나도 모르게 그리워 하고 또 아이와 함께 찾아가게 되는 것을 보면서. '아. 추억이 애정을 지속시키는 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롯데월드는 1989년에 개관했다. 그렇다. 한 때 '너 롯데월드 가봤어?'가 초등학생들의 뻐기기 레파토리였던 적이 있었다. 한 동안 마음 속으로 부러워만 하다가 (부모님이 놀이공원을 데리고 가주기를 기대하기에는 약간은 많은 나이였다) 정말로 무료하고 추운 겨울 방학 어느날 갑자기, 오빠가 롯데월드를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부모님과 같이 가지않아도 지하철 몇 정거장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잠실역에 내려서 롯데백화점 앞의 트레비분수를 보았을때 얼마나 황홀했는지 (훗날 진짜 트레비분수를 보고, 잠실 롯데의 그 트레비분수가 얼마나 동네목욕탕같은 분위기인지를 깨달았지만), 스페인해적선이 얼마나 다른 동네 바이킹보다 크고 무서웠는지, 신밧드의 모험이나 지하탐험보트(당시에는 정글탐험보트가 아닌 지하탐험보트였음)가 얼마나 신기했는지. 겨울이었는데도 얼마나 따뜻했는지. 아직도 그 기억이 난다.
롯데월드는 중학교 때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학원 같은 반이었던 애들과 아주 친해서 잘 몰려다녔었는데(부모님들도 우리가 친한 걸 모두 알고 묵인(?)했었다.) 방학특강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가끔은 선생님과, 또 가끔은 우리 끼리 방학마다 한번씩 롯데월드를 갔다. 주로 추억이란 놀이기구가 황홀했던 기억보다 한두시간 기다리는 것인 기본인 인기 놀이시설 앞에서 기다리면서 묵찌빠를 하고, 제로를 하고, 벌칙으로 손목이나 딱밤을 때리기도 하며 평소 학원에서는 해보지 못한 놀이에 관한 것들이다. 후렌치레볼루션이나 지하탐험보트같이 둘씩 앉는 놀이기구를 타게 되면 혹시나 남몰래 좋아하는 그애와 나란히 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감과 함께. 중3 겨울방학. 모든 애들이 다 집에 돌아가고, 우연인지 의도인지 9시 그 애와 나만 남아 아이스링크를 내려다보며 레이저쇼를 기다리고. 주위가 어두워지고 천장의 가짜별이 반짝반짝하고 레이저가 황홀한 나비문양을 만들어 낼 때, 짐짓 가만히 내 옆머리를 귀 뒤로 꽂아주던 서툰 그 애의 손길과, 말할 수 없이 두근 거렸던 나 심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레이저쇼가 다 끝날때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끝내 밝은 지하철역으로 말없이 발길을 돌리던 순진한 두 사람이 생각난다.
첫사랑과 첫 데이트를 했던 곳도 롯데월드였고, 지방 출신이던 친구가 군대가기 전날 친구들과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우르르 몰려갔던 곳도 롯데월드였다. 결혼하고 미국에서 살던 언니가 첫아이를 얻고 귀국했을 때 같이 갔던 곳도 롯데월드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지막으로 롯데월드를 갔던 것은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옆팀 신입사원이 뜬금없이 공짜표가 생겼다며 롯데월드를 같이 가자고, 휴일날 집앞까지 우리 집 앞까지 자기 차로 데리러 와서, 같이 하루 종일 잘 놀고 돌아오는 길에 됐다는 데도 극구 로리 인형까지 사 준 일이 있었다. 그게 롯데월드를 갔던 마지막이었고, 시작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의 데이트 신청도 마지막이었다.
오랜만에 가본 롯데월드는 뭐랄까. 더 내공이 강해진 마녀의 숲 같달까. 오래된 놀이기구는 꾸준히 윤색되어 초창기보다 채도가 더 높아졌고, 다닥다닥 테트리스 쌓듯 조그마한 공간도 돈벌이에 사용하겠다는 철저한 공간활용 능력은 더욱 대단해졌다. 가짜의 냄새는 더더욱 강해졌지만. 나는 어제 또 다시 이 가짜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과의 추억을 만들었다. 그렇게 많이 롯데월드를 갔지만 회전목마를 탄 건 처음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500원 넣는 자동차만 타 보던 아이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터지는 아이의 탄성은 그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궤도를 뱅뱅 도는 그 단순한 자동차에 타서도 아이는 운전대를 자기 맘대로 돌려도 된다는 자유에 탄성을 질렀고, 내리면서 '아쉽다아~'를 연발했다. 그렇게. 아마도 이 말도 안되는 공간에 대한 애정은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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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21:23 2011/07/1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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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 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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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1:21 2011/05/1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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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으로 향했다.

국립발레단 코펠리아를 보러.
이게 우리 딸 이번 어린이날 선물이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내가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긴 기간 세상과 단절(?)된 채로, 문화생활이란 그저 소설읽고 TV보는게 다였던 암흑기에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것.
바로 "아이가 48개월이 넘으면 크리스마스에 호두까지인형 발레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왜 하필 호두까지 인형이냐 하면, 많은 공연 예술이 '미취학아동'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고,
미취학 아이가 볼 수 있는 공연이라면 전용 공연인데, 그건 내가 보기 싫은 거고 (전에도 말했듯, '애가 즐거우니까 나도 즐겁다' 따위는 없다. 나도 그럭저럭 즐길 거리가 되야 뭐든지 할 맘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그런지 아동전용공연의 퀄리티도 점점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아동 전용'공연은 아니면서, 아동의 입장을 허락하는. 그렇다. 호두까지 인형인 것이다. 흑흑흑.

그런데 지난 겨울 드디어 아이가 48개월을 넘겼을 때, 예술의 전당 공연을 예매하려니 가격도 어마어마하고, 오페라극장 공연인걸 생각하면 조금 저렴한 표 사면 꼭대기에서 고개 빠지게 내려다 봐야 할게 뻔하고. 그래서 아쉽지만 '48개월이 지난 후 딸과 함께 발레 공연 관람'이라는 꿈은 접었었다.


그런데 이번 어버이날 선물로 부모님 공연티켓 하나 사드리려고 검색하다가! (부모님은 메노포즈 보여드렸고, 만족하셨다.)
두둥~ 이 코펠리아를 발견한 것이다. 괜찮은 가격, 게다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어느 자리에서 봐도 어느 정도 잘 보인다), 그리고 해설이 있는 발레공연이 아닌가.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그 환상의 문구. 48개월이상 유아 관람 가능

공연시간이 한시간 약간 넘어서 괜찮았고,
지루해지기 쉬운 해설도, 아이와 어른의 눈 높이를 잘 맞춰 주었던 것 같다.
해설할때 센스있는 아이들의 대답이 더 포복절도 하게 했던 듯 하다.
그 아이들의 대답을 받아치는 해설자 발레리노의 센스도 만점이었고.

내용은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각색 버전?
코펠리우스 박사가 나오고, 움직이는 인형이 나온다는 점이 비슷한데
아마 같은 원작으로 각각 다른 각색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울 딸 56개월 정도지만 아직은 물론 아이들에게 어려운 공연이긴 하지만,
공연가서 발레에 '마임'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자꾸 손짓으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딸 데리고 공연장 갈 일이 있다면, 이 국립발레단 해설발레 시리즈를 잘 애용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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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03 2011/05/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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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아이와 둘이 남산 한옥마을에 갔다.

봄꽃을 보면 슬픈마음이 풀어진다고 말하는 아이,
이 나무, 저 나무 돌아다니며 꽃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산수유, 동백꽃, 벚꽃,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 민들레, 철쭉.
올 봄,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된 꽃 이름들을 대며 사방으로 뛰어다닌다.

바람이 불어 진달래가 바람에 흔들리자, 아이가
"진달래가 바람에 흔들리니까, 꼭 진달래가 춤 추는 것 같애." 한다.


한옥마을 내의 '다반사' 카페에서 아이와 마주보고 새콤달콤한 오미자 차를 마셨다.
아이가 "차를 마시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애."한다.
헉... 왠지 이 대사는 홈쇼핑 채널을 많이 본 듯한 대사다.
니 머리 속도 복잡했단 말이냐.


함께 전통 악기 구경도 하고, 농기구 구경도 하고,
주말 상설 무료공연도 보았다.
유치원에서 장구를 배워서인지, 아이가 사물놀이 공연을 참 좋아했다.


사물놀이가 끝나고, 소리꾼이 나와 '심청가 눈 뜨는 장면'을 했다.
감정표현, 공연력 등이 어찌나 대단한지
'아... 예전에 유명한 소리꾼 하나 마을에 뜨면 동네가 다 떠나갔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데 없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나는 아이를 옆에 앉혀두고 눈물을 짰다.

소리꾼의 페이스에 나 자신을 맡기면서 희노애락을 느끼는 동시에,
'심청가' 내용의 야만성에 치를 떤다.

사회 최저 생계자를 대상으로 시주금 300석에 눈을 뜰 수 있다고 사기를 치는 절 주지나,
배를 띄우면서 바다에 빠져죽는 위험을 줄여보고자, 인신을 제물로 삼아 바다에 던지는 뱃사람이나,
장애 치유를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는 청이를 효녀라고 치켜 세우는 사회나.

내가 절대 '효녀 심청'을 아이에게 읽어주지 않는 이유다.


봄나들이의 완성. 솜사탕을 하나 사먹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것으로
이번주의 봄 나들이도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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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2:49 2011/04/18 12:49
분류없음 2011/04/18 12:49 by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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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살이 된 아이가 말한다.

"엄마. 별 것 아닌 일에도 왠지 슬픈 마음이 와."

나는 당황스러워 뭐라고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오늘 아침 아이가 베란다 창 밖을 내다보곤 말한다.

"엄마. 하얗고 작은 꽃이 피었어."

과연, 화단 앞 앵두나무에 하얀 망울이 맺혔다.
고개를 들어 조금 먼 화단을 보니, 산수유도 만개를 했다.

"엄마. 봄 꽃을 보니까 봄 꽃 같은 마음이 와.
 봄 꽃을 보니까 슬픈 마음이 풀어져. 슬픈 마음이 사라져."



아이야, 주말에는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방사능물질이 많아도
나와 봄 꽃을 보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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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8 09:03 2011/04/08 09:03
분류없음 2011/04/08 09:03 by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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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도 우수하고, 누구보다 좋은 성과를 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누적 인사평가가 최우수 등급이었단 말이다. 억울하고 울컥하고. 임신과 육아를 지나오면서 남들보다 너덜너덜해지고 파란만장해진 커리어가 더 없이 서러웠다. 억울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무엇이 억울한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순간 영화 블랙스완의 니나가 떠올랐다. 오디션 때 자신의 약점을 명확히 꼬집히고, 결과를 뒤집기 위해 예술감독인 리로이를 찾아가는 니나 말이다. 니나는 더 없이 설득력 없게 '잘 할 수 있어요. 다 외웠어요.'라고 말하고, 리로이가 '이미 베로니카로 결정했다'라고 말하자 바로 문을 열고 나선다. 하지만 그런 니나를 잡는 리로이. '겨우 그  정도만 하려고 그러고 왔냐' 라는 말. 그렇다. 니나의 행색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그녀는 남몰래 들어간 프리마발레리나 베쓰의 분장실에서 립스틱과, 줄과, 액세서리를 훔친다. 프리마 발레리나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얻어보려는 그 절실함. 그 절실함의 결과물로 얻어낸 진한 립스틱- 평소에는 전혀 바르지 않는-을 바르고 예술감독을 찾아갔었던 것이다. 니나가 설득은 아주 소심하게 하고 또 곧바로 포기하고 문 밖으로 나가긴 했지만, 리로이는 거기서 그녀의 열망을 봤을 것이다. 자신의 추행에 가까운 행동(사실은 그냥 추행)에, 빠르게 반격을 가하는 니나를 보고 리로이는 그녀에게서 마침내 추출해내고야 말 흑조의 기질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 무대로 이끌어 내기 위해 니나를 닦아세웠고, 니나는 스트레스를 받아 자아가 분열되어 갈 망정 그 열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나는 립스틱을 바르고 사업부장실 문을 열만큼 용기가 있는가. 아니, 그 만큼 원하는가. 그것은 '열망'이라고 말할 만한 것인가. 아니다. 어떤 논리를 세워보고, 질문을 바꾸어 나에게 물어봐도. 내 열망이 무엇인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망이 없는자는 억울할 것도 없다. 좌절할 것도 없다.

나는 그저 뚜벅 뚜벅. 걸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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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1 20:52 2011/03/11 20:52
분류없음 2011/03/11 20:52 by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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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읽었던 느낌하고는 천양지차다. 전처만, 머릿방아씨, 태임이, 종상이, 태남이, 여란이 등 등장인물들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것만이 내가 예전에 읽었었다는 증거가 될 뿐. 세월을 지나 읽는 그 느낌은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줄여서 얘기하자면, 지금 읽은 것이 예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그때는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은, 그리고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다.

다르게 보이는 등장인물들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릿방아씨의 자기방기(自己放棄), 그런 사람으로 부터 나온 신비할 정도의 놀라운 열망. 고등학교 때 읽을 때는 너무나 모순되어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머릿방아씨가 자기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기할 수 없어서 생활을 방기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활을 풀어놓을 대로 풀어 놓아, 그 힘으로 자기를 지키다가 결국 그 풍선효과로 또 강렬한 생존본능에 사로잡히게 되는 강력한 길항작용을 견디어 내는 삶.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머릿방아씨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전처만의 처(妻) 홍씨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홍씨에게 남아있는 인상이란,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고 있지를 못해 쓸고 닦고 만들고 먹는 살림에 목숨 걸어 domestic goddess가 되고자 하는 psycho 혹은 그악스러운 시어머니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본 홍씨는 그렇지 않다. 심성이 바르고, 차분히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원망삼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를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앞의 부조리(며느리의 부정)를 원망삼은 단 한번의 댓가로 홍씨가 치르는 대가는 사실 가혹하다 할 만하다.
전처만의 세째아들인 이성이는 고등학교 때 읽은 경험으로 '천하에 약삭 빠르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야차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읽고보니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반보 앞서 보고, 되도 않는 뚝심이나 불도저 정신같은거 없이 착실하게 자기 장사를 해 나가는 사람이다. 대단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차분히 시대의 큰 파도를 탈 뿐이다. (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내가 그 동안 닳고 닳은 것인지도)
주인공 부부라 할 수 있는 전태임, 김종상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는 참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태임이가 거상(巨商), 거목(巨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판단 오류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으면서 이런 거상(巨商)에게 사임당을 닮으라는 "태임"이라는 이름은 너무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집안을 꾸려나가는 배포에 있어서는 거목인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당찬 상속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어릴 때 읽을 때는 태임이의 이미지에 가려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상이의 그릇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적 가족 - 콩가루 집안? 아니,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정
읽으면서 놀랐던 건, 이 소설 면면히 흐르는 '가족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없이 흘러가는 '대안 가족'의 얘기가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 얽매인) 가족해체를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촌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100년전 개성을 그리는 박완서 할머니의 발상에는 혁명적인데가 있다. 세간의 잣대로 보면 콩가루 집안일지 모르나 진정 진보적이고 인간적이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가진 아이를 거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전처만 - 그 핏줄에 대한 인정이, 최초의 가부장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의는 차치해두자-을 비롯하여,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이종상-전태임 커플또한 녹록치 않다. 시집와서 시댁 귀신이 되지 않는 다면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는 것이 마땅한 시대에, 남편옆에 있는 여란에게 보란 듯이 쿨하게 민적을 갈라나가고, 일본 유학 후 재혼을 하는 상철이 댁. 시집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구들이 먹고남긴 잔반을 허겁지겁 입에 주워넣던 승재네 며느리가, 남편 살해범을 자처 한 후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 뒤,'혜정이'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찾아 갖는 그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 혜정은 또 추후에 태남과 재혼하여 사실상 동해랑의 안주인이 되니, 신기하고 신묘한 가족사다.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이 생각나는 대목이니, '미망'이 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가.
전태임, 김종상의 부부 관계가 모던한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니, 모던하다못해 황당(?)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의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필종부의 관계도, 처갓집 뜯어먹고 사는 관계도 아닌, 그저 인생의 동반자 관계.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다. (물론 이 와중에 둘 사이의 소생인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전태임의 몫이긴 하다.)

박완서는 초기작과 말년작만 읽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왕성하게 필력이 뻗치던 시절. 그 시절의 글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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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11:40 2011/03/07 11:40
분류없음 2011/03/07 11:40 by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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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글 읽기가 시작되었다.
더듬 더듬 한 글자씩 읽은 것은 일년 남짓 되었고, 이젠 제법 문장을 붙여 자연스럽게 읽는다. 일년 정도만 지나면 스스로 책장에서 책을 뽑아 소리내어 읽지 않고 묵독을 하는 것이 가능해 지리라.

그 상상만으로도 흐뭇해 지는 것은, '읽어주는 일로 부터 해방'되고, '함께 각자의 책을 읽는 독서의 시간'이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행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문득 문득 아이를 키우며 잊고 있었던 내 유년의 행복한 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른 식구들은 전부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간 시간. 깨끗이 치워진 식탁에 마주 앉아 뒷창문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엄마는 학원사 세계문학을, 나는 딱다구리 범우사 문고를 읽던 풍경이 동화처럼 떠오른다. 엄마가 읽고 있던 책은 "싯다르타", "수레바퀴 밑에서", "아메리카의 비극", "성(카프카)", "휘청거리는 오후"등이 적당하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닐스의 모험" 등이면 적당하다.

나는 아이와 어떤 책을 읽게 될까. 아이는 어떤 책을 좋아할까. 설레고 설렌다.

제발, 아이가 책을 자유롭게 골라 읽을 나이에, 독서 목록을 강요하는 엄마가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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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11:11 2011/02/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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